바빌론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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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7세기 말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당한 사건을 말한다. 유다 왕국은 바빌론의 침략으로 여러 차례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왕과 귀족,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유수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유대교를 발전시켰고, 구약성서의 기초가 되는 경전들이 정리되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의 칙령으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했으며, 이 사건은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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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제2대 국왕으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국을 확장하고 바빌론 유수를 일으켰으며 바빌론 재건을 통해 황금기를 이끌었으나, 잔혹한 통치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 바빌론 유수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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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다 205세에 사망했고, 종교적 전통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 역대기 - 니므롯
니므롯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구스의 아들이자 함의 손자로, 세상의 첫 용사이자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으로 묘사되며, 시날 땅에 왕국을 건설하고 바벨탑 건설과 관련된 전승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 예레미야서 - 에벳멜렉
에벳멜렉은 성경에 등장하는 구스 출신 환관으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구해내어 불의에 맞서는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며, 예레미야서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실천한 사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 예레미야서 - 우리아 (예언자)
우리아는 유다 왕국 시대에 활동했으며, 여호야킴 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처형당한 기럇여아림 출신의 예언자이다.
바빌론 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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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바빌론 유배 바빌론 망명 |
시기 | 기원전 597년 ~ 기원전 539년 (약 58년) |
관련 성경 | 열왕기하 24-25장 역대기하 36장 예레미야 25장, 29장 다니엘 에스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델 |
원인 | 신바빌로니아의 유다 왕국 정복 및 주민 강제 이주 |
결과 | 키루스 칙령에 따른 유대인 귀환 허용 제2성전 재건 유대교 정체성 강화 |
영향 | 디아스포라의 시작 유대교 경전 및 전통 발전 유대교-기독교 신학 형성에 영향 |
역사적 배경 | |
유다 왕국 | 기원전 8세기부터 신아시리아 제국의 속국 기원전 7세기 말, 아시리아 제국 쇠퇴 후 독립 시도 |
신바빌로니아 제국 | 나보폴라사르가 기원전 626년에 건국 니느웨 함락 (기원전 612년) 이후 서아시아 강국으로 부상 |
바빌론 포로 이전 상황 | 여호야김 왕의 친이집트 정책 바빌론의 1차 침공 (기원전 597년): 여호야긴 왕과 지도층 포로로 끌려감 |
바빌론 포로 시작 | 시드기야 왕의 반바빌론 정책 바빌론의 2차 침공 (기원전 587년/586년): 예루살렘 함락 및 성전 파괴, 추가 포로 발생 |
바빌론 포로 기간 | 약 50년 ~ 70년간 지속 포로 생활 동안 유대인 공동체 유지, 종교 및 문화적 정체성 보존 |
바빌론 함락 및 귀환 | 키루스 2세의 바빌론 정복 (기원전 539년) 키루스 칙령: 유대인 귀환 및 성전 재건 허용 |
성경적 관점 | |
원인 | 야훼에 대한 유다인들의 불순종과 우상 숭배에 대한 신의 징벌 |
목적 | 유다인들의 죄를 씻고,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한 고난의 시간 |
중요 인물 | 다니엘: 바빌론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며 유대인 공동체를 이끈 예언자 에스겔: 바빌론에서 환상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전한 예언자 |
귀환 | 키루스 2세를 신의 도구로 묘사 유다인들의 귀환과 제2성전 재건을 신의 은총으로 해석 |
역사적 논쟁 | |
포로 인원 | 성경 기록에 따라 다르며, 정확한 인원 파악 어려움 |
포로 시기 | 기원전 597년부터 기원전 539년까지 다양한 견해 존재 |
포로 생활 | 고난과 차별뿐만 아니라, 바빌론 문화에 동화된 유대인도 존재 |
귀환 동기 | 신앙심 외에도, 페르시아 제국의 정책적 필요성도 작용 |
페르시아 시대 | |
키루스 칙령 |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허락을 내림 종교적 관용 정책의 일환 |
스룹바벨 | 귀환한 유다인들의 지도자로, 제2성전 재건을 시작 |
에스라와 느헤미야 | 종교 개혁과 유다인 공동체 재건에 헌신 율법을 강조하고,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 |
문화적 영향 | |
유대교 | 경전의 편집과 해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짐 회당 중심의 공동체 문화 형성 안식일 준수와 할례 등 민족 정체성 강화 |
기독교 | 구약성경의 중요한 배경 바빌론은 죄악과 타락의 상징으로 등장 |
같이 보기 |
2. 성경 기록과 역사적 배경
바빌론 유수는 성경의 여러 부분에 기록되어 있으며,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다.
바빌론 유수기 동안 유대인은 고난과 고통으로 민족일치를 강화했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여 유대교를 정립하였고, 이 기간 동안 경전을 정리하여 구약 성서의 기초를 만들었다.[37]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앞선 문화를 접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윤리성을 받아들여 현세 지향적이던 유대교를 선진화시켰다.[37] 일부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남아 공동체를 유지했는데, 이들이 디아스포라의 유래가 되었다.
기원전 7세기 말,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 제국의 종속국이었다. 아시리아가 멸망하고 신 바빌로니아 제국이 부상하면서 유다 왕국은 바빌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집트는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유다 왕국을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유다 왕국 내에서는 친 이집트파와 친 바빌론파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요시야 왕은 므깃도 전투 (기원전 609년)에서 이집트와의 전투 중 사망했다. 기원전 605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2세는 카르케미스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유다 왕국을 압박하였다. 여호야김 왕은 느부갓네살 2세에게 조공을 바치고, 유다의 젊은 귀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후 유다 왕국은 친 이집트 정책을 펼치며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다. 느부갓네살 2세는 기원전 598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9] 여호야김 왕은 포위 중에 사망하였다.[10] 그의 아들 여고냐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12] 느부갓네살 2세는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을 약탈하고 여고냐 왕과 많은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13]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 왕은 다시 바빌론에 반란을 일으키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다. 느부갓네살 2세는 재차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기원전 587년 도시를 함락시켰다. 성벽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시드기야 왕은 사로잡혀 아들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본 후 눈이 먼 채 바빌론으로 끌려갔다.[18] 이로써 유다 왕국은 멸망하고, 바빌론의 예후드 지방이 되었다.
바빌론이 임명한 첫 번째 총독은 게달리야였으나, 얼마 후 암살당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피난을 갔고, 이로써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다.
에스라기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을 점령한 이듬해인 기원전 538년에 유수를 끝냈다.[16] 유수는 스룹바벨 (그는 다윗 왕가의 후손이었다)과 여호수아 (전 성전 대제사장의 후손)의 귀환과 기원전 521년부터 516년까지의 기간에 두 번째 성전 건설로 끝났다.[16]
2. 1. 유다 왕국의 멸망
기원전 7세기 말,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 제국의 종속국이었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멸망하고 신 바빌로니아 제국이 부상하면서 유다 왕국은 바빌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집트는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유다 왕국을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유다 왕국 내에서는 친 이집트파와 친 바빌론파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다.요시야 왕은 므깃도 전투에서 이집트와의 전투 중 사망하였다.[9] 기원전 605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2세는 카르케미스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유다 왕국을 압박하였다. 여호야김 왕은 느부갓네살 2세에게 조공을 바치고, 유다의 젊은 귀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후 유다 왕국은 친 이집트 정책을 펼치며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다. 느부갓네살 2세는 기원전 598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9] 여호야김 왕은 포위 중에 사망하였다.[10] 그의 아들 여고냐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12] 느부갓네살 2세는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을 약탈하고 여고냐 왕과 많은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13]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 왕은 다시 바빌론에 반란을 일으키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다. 느부갓네살 2세는 재차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기원전 587년 도시를 함락시켰다. 성벽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시드기야 왕은 사로잡혀 아들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본 후 눈이 먼 채 바빌론으로 끌려갔다.[18] 이로써 유다 왕국은 멸망하고, 바빌론의 예후드 지방이 되었다.
바빌론이 임명한 첫 번째 총독은 게달리야였으나, 얼마 후 암살당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피난을 갔고, 이로써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다.
2. 2. 바빌론에서의 유수 생활
바빌론 유수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민족적 일체감을 강화했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여 유대교를 정립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경전을 정리하여 구약 성서의 기초를 만들었다.[37]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앞선 문화를 접했다.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절대적인 신과 인간 심판 개념은, 현세 지향적이었던 유대교에 윤리성을 도입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37]
유대인 포로민 대다수는 바빌론의 니푸르 시 근처 크바르 강을 따라 이주했다. 이 지역은 한때 아시리아의 요새였지만, 신 바빌로니아 부흥기의 전투로 황폐해졌고, 유대인이 이주지로 이곳을 선택한 것은 감소한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장인 등 숙련 노동자는 바빌론 시로 이주하여 주로 느부갓네살 2세가 추진한 건설 사업에 종사했다.
에제키엘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 유다의 포로민들은 강제 이주가 일시적이며 곧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낙관론을 가졌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을 예언했고, 기원전 586년에 성전이 파괴되자 낙관론은 사라졌다.
장기간 바빌로니아에 거주하게 된 유대인들은 현지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1, 2세대가 지나면서 바빌로니아식 이름을 가진 자가 많아졌고, 여호야킨 왕의 손자 스룹바벨(‘바빌론의 씨앗’이라는 뜻)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왕족 사이에서도 그러했다. 월명(月名)에도 바빌로니아 월명이 채택되었고, 문자 문화에도 아람 문자 초서체가 사용되는 등 큰 영향을 받았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사회와 종교 속에서 갈등하며, 민족의 행보와 종교를 재고하게 되었다. 종교적 유대를 강화하고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를 확립했다. 또한, 신 야훼를 유일신으로 재인식하고, 구약성서의 천지 창조 이야기가 기술되는 등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남아 공동체를 유지했는데, 이들이 디아스포라의 유래가 되었다.
2. 3. 페르시아의 귀환 허용
에스라기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을 점령한 이듬해인 기원전 538년에 유수를 끝냈다.[16] 키루스 실린더는 키루스의 이름으로 성전 재건과 추방된 사람들의 귀환에 관해 기록된 고대 석판으로, 키루스에게 귀속된 성경의 칙령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25]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실린더의 내용이 바빌론과 메소포타미아에 국한되어 있으며, 유다나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지적한다.[25] 레스터 L. 그라베 교수는 유다에 관한 "키루스의 칙령이라고 주장되는 것"은 "진실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추방된 사람들이 돌아와 종교 시설을 재건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반적인 정책"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귀환이 단일 사건이 아닌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 "소규모 유입"이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26]기원전 537년 초,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는 포로로 잡혀 있던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슈아의 인도로 4만 2,360명의 "유수 자손"과 7,537명의 노예 및 찬양대가 약 4개월에 걸쳐 여행했다. 아이작 리서 번역 성경 제6판의 각주에 따르면, 그 인원은 부녀자를 포함하여 약 2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가을 일곱째 달까지 자신들의 도시에 정착했다. 유수는 스룹바벨 (그는 다윗 왕가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과 예수아 (전 성전 대제사장의 후손)의 귀환과 기원전 521년부터 516년까지의 기간에 그들의 두 번째 성전 건설로 끝났다.[16]
3. 고고학적 증거
바빌론 연대기는 느부갓네살 2세의 예루살렘 포위, 왕 체포 및 다른 왕 임명, 기원전 597년 도시 약탈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18] 연대기에는 "일곱째 해, 키슬레브 달에 아카드 왕은 군대를 소집하여 하티 땅으로 진군하여 유다 도시에 진을 치고, 아다르 달 아홉째 날에 그 도시를 점령하고 왕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곳에 자신이 선택한 왕을 임명하고 막대한 조공을 가져와 바빌론으로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8]
여호야긴의 식량 정표는 포로로 잡힌 유다 왕 여호야긴에 대한 식량 배급 명령을 묘사하며, 느부갓네살의 왕실 기록 보관소에서 바빌론 발굴 중에 발견되었다.[19][20] 이 정표 중 하나는 "야후두 땅의 왕 야우키누"와 그의 아들 다섯 왕자에게 지급되는 식량에 대해 언급한다.[21]
느부갓네살과 바빌론 군대는 기원전 589년에 유다를 휩쓸었고, 많은 마을과 정착지에서 파괴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18] 이 시기에 발굴된 점토 오스트라카는 라키스 서신으로 불린다. 그 중 하나는 외곽 기지에서 라키스 사령관에게 보낸 것으로, 인근 마을의 신호 불이 사라진 것을 묘사하며, "라키스의 신호 화재를 나의 주께서 주신 모든 징후에 따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제카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적혀 있다.[22] 예루살렘의 고고학적 발견은 기원전 587년에 성벽 안의 거의 모든 도시가 잿더미로 불타 파괴되었음을 보여준다.[18]
고고학 발굴 및 조사에 따르면 바빌론 파괴 이전 유다 인구는 약 75,000명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유배자 수를 최대로 잡아도 20,000명으로, 인구의 25%가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나머지는 유다에 남았음을 의미한다.[18] 예루살렘은 파괴되어 15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지만, 유다의 다른 정착지들은 계속 거주했으며 고고학 연구에서 혼란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18]
고고학자 아브라함 파우스트는 바빌론인들의 추방, 처형, 전쟁 중 기근과 전염병으로 유다 인구가 추방 이전의 10%까지 감소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23]
키루스 실린더는 키루스 대왕의 이름으로 성전 재건과 추방된 사람들의 귀환에 관해 기록된 고대 석판으로, 성경의 칙령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25]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실린더 내용이 바빌론과 메소포타미아에 국한되며 유다나 예루살렘은 언급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25] 레스터 L. 그라베 교수는 유다에 관한 "키루스의 칙령"은 "진실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추방된 사람들이 돌아와 종교 시설을 재건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반적인 정책"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귀환이 단일 사건이 아닌 수십 년에 걸친 "소규모 유입"이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26]
2017년 예루살렘 전시회에서는 기원전 600년경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의 과일 등 상품 거래, 세금, 부채 및 신용에 대한 세부 사항을 담은 100개 이상의 설형 문자 점토판이 전시되었다. 이 점토판에는 히브리어 이름을 가진 4대에 걸친 한 유대인 가족에 대한 세부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28][29]
4. 유대교와 유대 문화에 미친 영향
바빌론 유수는 유대교와 유대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로마 제국 시대의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4. 1. 종교적 발전
바빌론 유수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민족적 일체감을 강화했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통해 유대교를 정립했다. 이 시기에 경전을 정리하여 구약 성서의 기초를 마련했다.[37]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선진 문화를 접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는 절대적인 신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개념을 통해 인간사에 윤리성을 도입했는데, 유대인들은 이 교리를 받아들여 현세 지향적이던 유대교를 발전시켰다.[37]
바빌론에 잔류한 유대인 공동체는 디아스포라의 기원이 되었다.
히브리 성경에서 바빌론 유수는 우상 숭배와 야훼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나타나며, 이는 이스라엘의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과 구출과 유사하다. 바빌론 유수는 유대교와 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현재의 히브리 문자가 이 시기에 채택되어 고대 히브리 문자를 대체했다.
이 시기는 히브리 성경 예언의 마지막 절정기인 에제키엘 시대를 거치며, 유대인의 삶에서 토라의 중심적 역할이 부상했다. 많은 고등 비평 학자들에 따르면, 토라는 이 시기에 편집되어 유대인들에게 성경 정경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 기간은 그들이 중앙 성전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종교적 민족 집단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었다.[33] 이스라엘 철학자이자 성경 학자인 예헤즈켈 카우프만은 "유수는 분수령이다. 유수를 기점으로 이스라엘의 종교는 종말을 고하고 유대교가 시작된다."라고 말했다.[34]
이 과정은 유대교 지도자로서 서기관과 현자의 등장과 일치했다(에즈라 참조). 유수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부족별로 조직되었다. 이후에는 더 작은 가족 그룹으로 조직되었다. 레위 지파만이 귀환 후에도 성전 역할을 계속했다. 이 시기 이후로 항상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 밖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을 의미한다.
유다 포로민들은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된 것이 일시적인 것이며 곧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을 예언하며 경고했고,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유다 포로민들의 희망은 사라졌다.
장기간 바빌로니아에 거주하게 된 유대인들은 현지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1, 2세대가 지나면서 포로민들 중에는 바빌로니아식 이름을 가진 자가 많아졌다. 여호야킨 왕의 손자 스룹바벨('바빌론의 씨앗'이라는 뜻)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왕족 사이에서도 그 경향은 뚜렷했다.
또한 월명에 바빌로니아 월명이 채택되었다. 이전의 유대 월명은 '첫째 달', '둘째 달'과 같이 번호로 불렸지만, '니산월(첫째 달)', '이야르월(둘째 달)'과 같이 바빌로니아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문자 문화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전의 고대 히브리 문자 대신 아람 문자 초서체가 사용되었고, 문학에도 바빌로니아 문학의 영향이 나타났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압도적인 사회와 종교에 둘러싸인 갈등 속에서, 그동안의 민족의 행보와 종교의 모습을 재고하게 되었다. 종교적 유대를 강화하고, 잃어버린 예루살렘의 도시와 성전 대신 율법을 의지처로 삼게 되었으며, 성전 종교일 뿐만 아니라 율법을 중시하는 종교로서의 유대교를 확립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신 야훼를 재인식하는 과정이 이루어져, 신 야훼는 유대 민족의 신일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며 유일신으로 이해되었다.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대항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천지 창조 등의 이야기도, 구약성서학에서 '제2 이사야', '사제 기자' 등으로 불리는 종교인들에 의해 기술되었다.
4. 2. 문화적 변화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앞선 문화를 접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절대적인 신과 그 신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윤리적인 개념을 받아들여, 현세 지향적이었던 유대교를 발전시켰다.[37]바빌론 유수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현지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포로민들 중에는 바빌로니아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호야킨 왕의 손자인 스룹바벨('바빌론의 씨앗'이라는 뜻)의 이름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월명을 채택했다. 이전에는 '첫째 달', '둘째 달'과 같이 번호로 불렀지만, '니산월(첫째 달)', '이야르월(둘째 달)'과 같이 바빌로니아식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문자 문화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전의 고대 히브리 문자 대신 아람 문자 초서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문학에도 바빌로니아 문학의 영향이 나타났다.
한편, 바빌론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사회와 종교 속에서 갈등하며, 민족의 행보와 종교를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들은 종교적 유대를 강화하고, 잃어버린 예루살렘과 성전 대신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확립했다. 이 시기에 신 야훼는 유대 민족의 신을 넘어 세계를 창조한 유일신으로 인식되었다. 구약성서의 천지 창조 이야기는 바빌로니아 신화에 대항하기 위해 '제2 이사야', '사제 기자' 등으로 불리는 종교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 시대의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바빌론 유수를 계기로 확립되었다.
4. 3. 디아스포라의 시작
유대인 가운데 일부는 바빌론에 남아 공동체를 유지하였는데, 이들이 디아스포라의 유래가 되었다.[37] 기원전 6세기 20년대 말, 유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바빌론과 이집트에도 상당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는 이후 유대인 디아스포라에서 유다 밖에서 영구적으로 거주하는 수많은 유대인 공동체의 시작이었다.이 시기 이후로 항상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 밖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을 의미한다.
5. 강제 이주의 역사 (오리엔트)
고대 오리엔트 사회에서는 반란을 막고, 뛰어난 장인을 확보하며,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 이주가 자주 일어났다.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도 기본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 기원전 592년에 포로들에게 지급된 식량 공급 목록이 바빌론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목록에는 유다 왕 여호야킨, 유대인 가디엘, 세마프야후, 셰레미야후 등의 이름과 함께 티로스인, 비블로스의 목수, 엘람, 메디아,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스인 등의 이름이 언급되어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음을 알 수 있다.[37]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는 이러한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해 오늘날 가장 상세하게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6. 연표
연도 | 사건 |
---|---|
기원전 609년 | 요시야 왕, 므깃도 전투에서 이집트 군대와 싸우다 사망. 여호아하스가 3개월간 통치 후 폐위되어 이집트의 네코 2세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감. 여호야김이 네코에 의해 유다 왕이 됨. |
기원전 605년 | 바빌로니아 군대가 카르케미스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포위. 여호야김은 항복하고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2세에게 조공을 바침.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를 포함한 첫 번째 포로 이송. |
기원전 601년 | 바빌로니아 군대의 이집트 침공 실패. 여호야김은 다시 이집트에 충성을 맹세. |
기원전 598/7년 |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 여호야김 통치 종료. 여호야긴이 3개월간 통치. |
기원전 597년 | 예루살렘의 첫 번째 함락. 기원전 597년 3월 16일, 여호야긴과 에스겔을 포함한 두 번째 포로 이송.[9]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 왕으로 임명됨. |
기원전 594년 | 반 바빌론 음모. 시드기야는 암몬, 에돔, 모압, 시돈, 티레 왕들을 예루살렘에 소집하여 바빌론 지배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논의. |
기원전 587년 | 예루살렘의 두 번째 함락. 솔로몬 성전 파괴.[18] 기원전 587년 7/8월, 시드기야와 그의 아들들을 포함한 세 번째 포로 이송. 시드기야는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그의 아들들은 살해됨. |
기원전 583년 | 그달리야, 바빌론이 임명한 유대 속주 총독 암살. 많은 유대인이 이집트로 도망가고, 네 번째 포로 이송 가능성. |
기원전 562년 | 아멜마르두크 즉위 후, 바빌론 감옥에서 37년간 갇혀 있던 여호야긴이 석방됨. 여호야긴은 바빌론에 남음. |
기원전 539년 | 페르시아 군대가 바빌론 정복 (10월). |
기원전 538년 | 키루스 칙령에 따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됨. 스바사르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유대로 돌아옴. |
기원전 520–515년 |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아래 많은 유대인이 유대로 귀환.[16] 제2성전 기초가 놓임. |
기원전 457년 | 에스라 아래 세 번째 귀환,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토라를 재도입. |
기원전 444년 | 느헤미야 아래 네 번째 귀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과 그 성벽을 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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